술한잔 거하게 걸치고, 부른 배를 퉁퉁 튀기며 집으로 돌아가는 11시.
즉석에서 흥얼거린 글을 끄적여 본다.
나 아주 귀여운 여자앨 내 앞에 보고 있어
집에 돌아가는 2호선이지
술을 좀 마셔선지 더 사랑스러 보였는지 몰라
외모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딱 내 이상형인걸
나이스 챈스
옆옆 자리가 비어있지만 그다지 앉고 싶지는 않아.
왜긴 왜야. 그녈 좀 더 곁눈질로 보기 위해서지.
강남역에서 탔는데 가방에 책은 보이지 않아.
친구들과 수다떨다 들어가는 길이겠지.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군사우편을 읽고 있어
손가락을 깨물며 눈썹이 떨려
누가 봐도 군대 간 남자친구 때문에 갈등하는거겠지.
편지는 가방에 넣었어.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듯 보여
무어라 말을 걸어볼까...
지난번 장갑 잃은 여자에게도 명함 잘 건네줬잖아
하지만 지금은 펜이 없는걸.
무슨 말로 그녀의 관심을 끌어 호감을 살 기횔 만들까.
그녀의 표정에서 난 읽을 수 있어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어
나는 그런 그녀에게 해줄 수 있어
무엇이라도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야
뽀얀 피부에 살결이 고와
지금은 그녀 바로 옆 자리가 비었네
하지만 난 다음역에서 내려
그녀를 따라 내리는건 너무 구시대적이잖아
내가 지금 내리면 그녈 다시 볼 수 없긴 하겠지.
어라 이게 무슨일
내 심장이 콩닥거리네
그녀도 이번 역에서 내리네
좋아 개찰구를 나가면 바로 대쉬다.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대화 패턴들을 그려냈는데...
무슨 이야길 먼저 건넬까...
첫인상만큼은 깔끔하고 심플하고 스마트하게...
하지만 다 소용없게 되었어.
개찰구를 나가자 인파속에 파뭍힌 그녀를 찾을 수 없었지.
그렇게 나는 오늘도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