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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12.08 의외의 곳으로부터 온 전화 8

10년을 뒤돌아 보며

樂書 2007. 12. 21. 01:49

남들만큼이나 특별한 연말은 아니겠지만, 내 나름대로 올 연말은 특별한 연말이다. 평생에 한번 밖에 없는 2007년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내 20대 나날들의 마지막이기도 한 때문이다.

10대의 마지막은 훈련소에서 보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10년 전 이맘때쯤이면 총검술이 있던 6주차 훈련 기간이었을 것이다(그렇다면, 내 10대의 마지막은 총검술인가!). 유년기의 마지막 해인 9살의 겨울에는 무얼 했는지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아마도 그때는 그 시기가 평생에 한번 밖에 없던 시기였는지 미쳐 몰랐을 때였으리라. 초등학교 3학년이 어찌 인생의 흐름을 인지한단 말인가?

10년 동안 나는 대체 무얼 했던가? 군대를 갔다 왔고, 반년간 컴퓨터 학원 강사를 하고, 나머지 7학기의 수업을 들었고, 2년 5개월간의 연애를 하고, 1년 반의 회사생활을 하고, 2년 동안 대학원 연구실에서 칩거했고, 최근의 반년은 허울 좋은 알바를 뛰고 있다. 휴대폰 연락처 목록에 285명을 저장하고, 대략 300병의 소주를 마셨고, 6만여 개피의 담배를 피우고, 그 동안 마셔온 자판기 커피와 믹스 커피의 잔 수는 헤아릴 수 조차 없다. 전공서적과 같은 유(類)를 제외하고 20여 권의 책을 읽었고, 50여 편 정도의 영화를 보았다. 할머님께서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는 환갑(還甲)을 지내시고, 사촌 형과 사촌 누나가 결혼을 하여 세 조카가 태어났다. 15kg의 살이 찌고,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배도 조금 - 아주 조금 - 나오기 시작한다.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나는 사건들이 있었는가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일들도 있다. 이건 누구나가 마찬가지겠지만.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있었고, 잊고 싶은 추억들이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성장해가고, 변화해가고, 더욱더 강해져 간다.

그 끝에 서서, 10년 뒤 이맘때쯤을 추억했을 때 뭔가 기억에 남는 그럴싸한 것이 필요한데 말이다. ‘아! 10년 전 오늘은 이런걸 했었는데……’할 수 있는 그런 것. 거창한 연애도 크게, 오래 기억에 남을 법도 싶은데, 현실로 당장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연말에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 기왕이면 볼 살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겨울 바다가 있는 곳으로(태초부터 겨울 바다에는 낭만 따위는 결코 없다). 동해나 남해로(작금의 서해안 분들께는 죄송할 따름). 좀 크게 잡으면 제주도도 좋고. 동/남해라면 1박 2일. 제주라면 2박 3일. 어떤 코스가 좋을까. 아니면 옷 두툼히 입고, 편한 운동화 신고 무작정 남쪽으로 걸어가볼까. 2박 3일 정도 걸으면 천안까지는 걸을 수 있지 싶다.

뭔가 기억에 남을만한 그런 것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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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내 핸드폰으로 가끔씩 광고전화가 온다. 내 이름이나 몇가지 개인 정보들을 알고 있는게 신기할 뿐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결혼정보 업체에서도 종종 전화를 받고 있다.

난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전에 말했던 선관위를 미워하지 않는 이유와 같은 셈이다. 상담원에게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다시 전화가 안온다거나 하는)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좀 더 윗선을 바꿔달라고 해서 - 성공한다면 - 화를 낸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런 방법도 불운한(나에게 전화를 했다는 이유 하나로) 상담원에게 해가 될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친절히 전화를 받고 겸손하게 사양하고 전화를 끊는 편이다. 마지막 인사는 늘 "좋은 하루 되세요".

그제도 모 결혼정보 회사에서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꽤나 어려 보이는 상담원(아마도 커플매니져)이었는데, 적당한 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마침 무료했던 탓으로 조금 잡담이 늘었다. 그리고 습관처럼(이게 나의 습관이라는 말은 아니다) 나온 말들로 그녀를 떠보기 시작한다.

오늘 눈이 왔는데.. 보셨나요?

당황한 그녀는 1초정도 침묵을 지키다 미소띈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시작으로 몇가지 잡담이 오고갔고 그녀는 나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간다. 아이 재밌어라. 그리고 마지막은 늘 그렇듯 "좋은 하루 되세요".

남자친구가 없는 27살의 안양사는 그녀는 여의도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직업에 대한 캐리어career는 강하지만 경력은 그리 길지 않다. 그녀의 여린 마음은 아마도 그녀의 지금 직업에 가장 큰 약점이 될 것 같다.

어제도 눈이 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문자를 받고, 답문을 보낸다. 지극히 사적인 통화를 하지만 일(새 고객의 가입)이라는 이름의 두꺼운 벽을 앞세우고 있다. 어디 문이 있을런지, 아니면 그저 두꺼운 콘크리트 벽일런지는 아직 모르겠다. 나 역시 모호한 대답으로 적당히 회피하고 있지만 어디까지 숨길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결론은 두가지. 내가 지금 뭐하자는건지? 그리고 이젠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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